스물, 성년이 되기 전까지 한평생 인어로 살아온 레아 엘레노어. 문제가 있다면 구슬의 결정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인간이 됐다는 데에 있었다. “안녕.”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커다랗고 흉포하게 생긴 낯선 사내로 인해 아연실색한 그녀는 벌벌 떨리는 시선을 들었다. 어둠과 동화된 듯 고요하게 앉아 있는 그 사내는 요요하게 빛을 발하는 자색 눈동자를 드러내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절 놔주세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카스피안 펠릭스 공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반응이었다. *** 처절하게 시달리고 짓밟혔던 델라일루 그윈에게서 도망치고자 선택한 남자. “저를 보호해 주세요. 그 대가로 당신의 갈증을 해결해 드릴게요.” 그윈가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모를 그의 약점을 발설했다. “좋아, 거래를 논의해 보도록 하지” 서릿발처럼 차갑고 무심한 한마디가 흘렀다. 다행스럽게도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첫 거래가 이루어질 때까지만 해도 카스피안의 반응은 이랬다. 무심하고 냉정하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차가웠다. 그랬었는데, 도대체 지금 나한테 원하는 게 뭘까…? 기묘하게 빛을 발하는 자색 눈동자, 그 안에 작열하듯 열기로 가득 들어차 노골적으로 핥듯이 훑어 내리는 시선. 숨통을 조여 오는 그의 거대한 인영에 마른침을 꼴깍 삼켜 넘겼다. “그대와 나에게 가장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해, 결혼 말이야.” 그 언젠가 카스피안이 레아를 두고 했던 생각 중 하나가 스치듯 지나갔다. 레아 엘레노어, 그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카스피안 펠릭스의 유일한 구원이자 첫 순애가 되어 있었다. 일러스트: 배드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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