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문진우는 신부 진소한을 아내로 맞아 평생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거짓이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날, 진소한은 그녀의 첫사랑 문진우의 신부가 되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적어도 첫날밤을 보낼 때까지는. *** 진우는 얇은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쳤다. 그리고 캐리어 앞에 넣어 두었던 서류 봉투를 꺼내서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진우의 개인적인 일을 맡고 있는 법률 팀과 비밀리에 작성한 혼인 계약서였다. [계약의 목적, 본 계약은 혼인 당사자1 문진우와 혼인 당사자2 진소한의 혼인에 관한 사항을…….] [서로에게 감정적 유대 관계를 강요하지 않는다. 본 혼인은 남녀 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성사된 것이 아니며…….] 나만, 나만 사랑하는 거면 괜찮죠? ‘서로에게 감정적 유대관계를 강요하지 않는다.’ 였지, 사랑을 하면 안 된다는 조항은 아니었다. 남편을 짝사랑하는 아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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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을 품은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잠시 스쳐갈 인연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정신 잃은 당신을 상대로 무슨 일을 했을 줄 알고, 감사하지?” 낮게 깔린 목소리가 위험했다. 내내 책상 모서리에 기대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켜 민서 쪽으로 다가섰다. 심장이 쿵쿵 달음질쳤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아니까요.” “아무 일도? 그걸 어떻게 알지?” 알렉스의 푸른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 정도도 모를 만큼 둔하지는 않습니다.” 민서의 얼굴색이 파리하게 굳어갔다. “뭔가 기억이 났나보네. 재미있었어, 꽤.” 새 지사장으로 부임한 알렉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부하직원이 된 손민서. “그러니까 이건 내가 사장님을 갖고 노는 걸로 하죠. 그럼 얼마든지 미쳐 줄 생각 있어요.”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되고, 영원이 흩어져 순간이 된다. 영원할 것 같은 삶 속에서 의미만 잃은 남자와 순간뿐인 삶 속에서 의미만 찾는 여자의 계획적 혹은 운명적인 만남. 인간 모두에게 존재하는 삶의 주름이 허락되지 않은 남자, 정우진. 처연한 검보랏빛 눈동자, 세필로 그려 놓은 듯 아름다운 얼굴, 보기 드문 균형과 조화로 널리 시야를 이롭게 하는 그는 평화로운 품격을 추구하며 비밀스럽게 살아왔다. 권태로운 삶을 끝낼 의지도, 미래의 가능성을 꿈꿀 환상도 없는 그의 눈앞에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가 인상적인 여자가 자꾸만 알짱거린다. “첫 키스니까요…. 혼잣말이었어요. 못 들은 거로 해 줄래요?” 드라마 본방송은 안 봐도 뉴스 본방송은 보게 만든다는 뉴스 계의 아이돌, 강은성. 사회부 기자에서 앵커가 된 그녀는 전 국민의 저녁 1시간을 위해 전부를 쏟아붓는 열혈 언론인.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가슴으로 찰나의 가치를 따르는 그녀 앞에 영 수상쩍은 남자가 나타난다. “못 들은 거로 해 주면, 강은성 씨는 나한테 뭘 해 줄 겁니까?” 잇새로 흘러나온 습윤한 호흡이 그의 손끝을 타고 축축하게 번져갔다. “내가, 정우진 씨한테 뭘 해 주길 바라는데요?” “못 들은 거로 해 줄게. 강은성 씨는 나를 지켜 줘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사정과 상처를 숨기듯 그윽한 눈동자. 쓸쓸하게 물러서는 그의 뒷걸음질은 그녀를 안달 나게 했다. 일러스트: 진사
“저 트렁크 주인 변태 중에 상변태다! 하나같이 교미 중인 자세로….” 포근한 이불과 베개, 잠옷이 들어있어야 할 초연의 여행용 트렁크에는 곤충 교미 채집 표본이 가득했고. “이게…. 대체 뭔가?” 학회장 앞에서 열어젖힌 민현의 트렁크에는 귀하디귀한 채집 표본은 온데간데없고 웬 여자의 잠옷과 이불 한 채, 베개가 들어있다. 인천 공항 입국장이 아이돌 가수의 등장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면서 두 사람의 트렁크가 뒤바뀐 것! 민현은 살인범의 증거물 은닉을 의심하고, 초연은 변태의 수집품에 기겁한다. 트렁크 비밀번호까지 똑같은 두 사람은 운명인가, 악연인가. 살인범과 변태의 누명을 쓰고 트렁크를 맞교환하는 두 사람.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거라며 돌아섰는데, 지리산 관광 상품개발을 위한 협력 프로젝트에서 다시 만난다. “그때 그 트렁크에 있던 표본들이요. 짝짓기 중인 곤충이라고 하던데요.” “네, 액화 질소로 냉동한 겁니다.” “일종의 곤충 복상사인가.” 곤충의 잠자리를 연구하는 남자와 일평생 잠자리가 불편했던 여자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된다. 일러스트: DELTA
상실의 아픔을 가진 1605호 그. 배신의 상처를 가진 1606호 그녀.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다. “안녕하세요? 눈이 부시네요.” 대체 무슨 뜻이냐는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이다. 자신이 하는 말에 뜨악한 표정을 짓는 여자의 얼굴이 참 재미있다. “여기가 암실이거든요. 밖에 나왔더니 눈이 부셔서…….” 평범한 일상 속 반복되는 만남에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웠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서로의 아픔에 대한 깊은 공감은 황폐했던 마음에 따스한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보통의 날들을 공유하고 서로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아티스트 이유은 씨,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절대 어설픈 수작이 아니었다. 오래전 여름날 환자의 죽음 앞에서 무력감에 젖어있던 정범우를 구원해 준 여자. 이유은이 분명했다. 그때는 서브 인턴십도 끝나기 전에 튀더니, 지금은 감히 스승을 모른 척해? “죄송합니다. 저는 기억이 안 나서요. 그럼 살펴 가세요. 정범우 선생님.” 이유은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남자. 세상이 무너지던 날 가장 아픈 상처와 맞닿아 있는 남자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너 지금 자정을 넘긴 밤에, 술에 취한 상태로, 잘 모르는 남자 차 탄 거잖아.” 끝까지 모른 체하는 이유은이 괘씸해서 범우는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흉부외과 전문의로서 이건 부정맥이나, 심실빈맥이 아니었다. 명백한 두근거림이었다. 그러니까 괘씸해서. “저는 교수님 오해 안 해요. 교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거든요.” 여기서 유은이 혀 깨물고 죽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살려낼 훌륭한 의술을 갖춘 의사. 그리고 한때 이유은의 머릿속을 전부 차지했던 남자. 그때가 언젠데, 왜 아직도 두근거릴까. “왜 노려봐?” 시선조차 귀찮다는 듯이 무심히도 묻는 정범우가 당황하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잘생겨서 좀 봤어요. 왜요?” 유려한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고, 유은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고였다. 일러스트: 진사
제작 환경 좋기로 소문난 케이블 방송사로 이직한 나, 오밀희는 새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출연자 미팅에 나갔다가 당황하고 만다. 미팅 상대는 전 세계를 뒤흔든 올 라운드 스프린터, 아시아인 최초 투르 드 프랑스 구간 우승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로드 사이클리스트 공무진이었다. 그리고 그는 대학 시절 내 첫사랑이자 첫 남자, 내가 가진 모든 남자에 대한 기준이 된 유일한 남자이다. 불같은 사랑. 소원해진 관계. 자연스러운 이별. 어색한 재회. 하지만 이런 내 사정 따위 상관없이 슬레이트는 쳐졌다. 탁!! 나는 일생 처음 자전거를 타는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저, 계속 붙잡고 있는 거죠?” “놓은 적 없어요.” 멀리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나는 그만 화를 내 버렸다. “거짓말!” ……이미 놓았으면서. 그때처럼.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인 양 모든 것을 바친 여자가 있다. 황나윤,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그녀의 세상은 온통 도설우로 가득했다. 하지만 헤어진 캠퍼스 커플에게 남는 건 걔 친구가 내 친구여서 생기는 끔찍한 이별의 잔해뿐. “나윤아, 나 다음 달에 결혼해. 올 수 있어? 근데 알지? 내 남친이랑 설우랑 절친인 거. 걔가 축가 부를 건데, 안 불편하겠어?” 전 남친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도 마음 놓고 갈 수가 없다. 연애 주의 사항 첫 번째, 절대 소속이 같은 남자와 연애하지 말 것! 이리저리 연애를 피하다 보니 벌써 서른, 나윤의 앞에 유일했던 사랑 도설우가 다시 나타난다. 그것도 같은 부서, 직속 상사로. 연애 주의 사항 두 번째, 절대 헤어진 전 남친에게 다시 빠지지 말 것! 그런데 도설우가 아무래도 수상하다. 거침없이 찰 땐 언제고, 이젠 또 거침없이 들이닥친다. “프로젝트 합숙소가 호텔 방이라도 돼? 내 방에서 잠깐 회의만 하자는 거잖아.” 연애 주의 사항 세 번째, 절대 그놈과 다시 연애는 하지 말 것!
“저는 비즈니스 피보팅 팀 민이영입니다. 제 업무 외의 일은 처리해 드릴 수 없습니다.” “좋아. 앞으로 얼토당토않은 요청이 들어오면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알겠어?” 그가 내 소속을 분명히 해 주며 나를 보호하는 법을 알려 주는 순간, 고단언이라는 사람은 내 든든한 상사가 되었고. “민이영, 너 혹시 나 좋아하냐?” 오랜 짝사랑 상대 김주호가 친구 운운하며 개새끼가 되는 순간, 고단언이라는 상사는 남자가 되어 나를 흔들었다. 나는 결단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닌데 그는 자꾸 날 그렇게 만든다. 가령 ‘저 입술은 무슨 맛일까?’라는 충동적 의문을 품게 한다든가. “키스해 봐도 돼요?” 나의 겨울 같은 상사는 눈처럼 차갑지만 “사직서 가져왔어?” “……왜요?” 어쩐지 너무 섹시하고 달아서…… “감히 상사를 꼬신 죄로.” 아마도 차갑고 달콤한 눈의 맛이 아닐까?
나, 송세아는 지금 제일 핫하다는 배우, 원준한의 앞에 앉아 있다. 난 그를 몰래 덕질 중이었고, 왜인지 그는 내게 자신의 팬카페 게시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도 내가 쓴 게시물에 대해 말이다. “아무리 연기라도, 내가 다른 여자랑 키스했으면 좋겠나 봐, 그 팬은?” “보기보다 되게 소유욕 있으시네. 팬이 배우님만 생각하면서 망상 속에 빠져 살길 바라는 거예요?” “소유욕? 아직 소유욕의 시옷 자도 안 보여 줬는데?” 어머머, 저 눈빛 뭐야? “모든 팬이 그런 망상 속에 빠져 살기를 바라지는 않아. 다만, 그 팬만은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 눈으로 그런 말을 하면 오해하게 되잖아! 거듭되는 겨울의 인연을 대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2023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 부산스토리마켓 한국 IP 선정작] 규랑은 케이그룹의 부당한 인사 조처에 맞선 1인 시위 중, 그룹의 총수인 강 회장에게 기막힌 제안을 받는다. “연귀군 알지? 거기 죽은 내 남동생 손주가 틀어박혀 있거든. 그 아이 좀 찾아서 데리고 와 줄래요?” 그렇게 조카 손자 강이환이 칩거 중이라는 연귀군의 언덕마을로 향한 규랑. 그녀는 그곳에 자리한 펜션의 첫 투숙객이 된다. 서머싯 펜션과 카페의 주인 '서 대표'는 광고 모델 뺨치게 잘생기고, 오후에 동네 아이들 보모를 자처할 만큼 자상하고, 손에 행주를 달고 살 정도로 깔끔한데, 어딘지 모르게 수상하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수록 아픈 과거 속 첫사랑이 그리워지는 규랑은 과연 회장의 조카 손자를 찾아내서 서울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크고 작은 언덕이 많아서 언덕마을이라 이름 붙여진 곳에서 규랑의 굴곡진 추격이 시작된다.
가장 은밀한 곳을 내어 주고, 깊은 곳까지 맞닿아 세상 무엇보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은 갈망이 짙어진 순간. “그거 알아? 너한테선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나.” 그의 검은 눈동자에 두려움이 경련하듯 비쳤다. “순간적인 충동이나 욕구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열기가 부서져 내리는 탁한 목소리에는 허기가 역력했다. 감정은 의식하지 못한 순간 범람해서 투명하게 감각을 옥죈다. 서로를 향한 짙은 감정이 생명력을 얻는 데 걸린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다. 기나긴 세월을 축적해 온 관계에서 비롯된 욕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곡해될까 봐 두려운 거다. “나도, 그런 거 아니에요.” 삽시간에 비정상적으로 쏠린 마음을 어루만지듯 그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매끄러운 살갗에 닿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두려운가? 두려웠었다. 그가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 저어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단단한 품에서 느껴지는 안온함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안정감이 한없이 이어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고요한 그의 눈길을 피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처절한 죗값을 미리 치렀으니, 한 번만 더 그의 품에서 무너지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바람기 단속을 위해 시골집에 따라 내려온 첫날. 가위눌림에서 벗어나 눈을 뜨니 웬 저세상 미모의 미남이 눈앞에 서 있다. 혹시 이 방에 붙은 지박령? 나는 덜덜 떨며 구마의식까지 행했는데……. “이짝은 큰 손녀딸, 임다리미. 이짝은 우리 집 세 사는 총각, 서상년이.” 그렇게 세 들어온 상녀니(?)와 나, 할배. 세 사람의 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피차 어색한 사이. 어쩌다 그와 낚시를 가게 된 나는 쪽팔리게도, 바다에 빠지고 만다. Mouth to mouth. 그가 행하는 숭고한 구명의식에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나, 싶은 순간. “자극하지 마. 너 나 감당 못 해.” 삐뚜름한 미소로 읊조린 말은 내 승부욕에 불을 질렀다.
“일어나시죠, 유승현 씨.”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며칠 새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남의 영업장까지 찾아오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냐? 아르바이트로 대타 맞선을 보는 자리, 이 남자가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르바이트해서 축구 선수인 동생 뒷바라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쪽이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동생을 국가 대표로 만들어 주겠다는 에이전트 한지윤. 일언지하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앞으로 저런 인간들은 내가 상대해. 내가 지킨다는 뜻이야, 너도 그리고 네 누나도.”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 입술이 가볍게 한 번 스쳤다. 그는 승현의 이마에 입을 한 번 맞추고는 다시 젖은 입술을 머금었다. 그의 입술이 말도 못 하게 달콤해서 도무지 그를 밀어 낼 수가 없었다. 깊게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그가 승현에게 이마를 맞댄 채로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 안고 싶어.”
“저는 비즈니스 피보팅 팀 민이영입니다. 제 업무 외의 일은 처리해 드릴 수 없습니다.” “좋아. 앞으로 얼토당토않은 요청이 들어오면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알겠어?” 그가 내 소속을 분명히 해 주며 나를 보호하는 법을 알려 주는 순간, 고단언이라는 사람은 내 든든한 상사가 되었고. “민이영, 너 혹시 나 좋아하냐?” 오랜 짝사랑 상대 김주호가 친구 운운하며 개새끼가 되는 순간, 고단언이라는 상사는 남자가 되어 나를 흔들었다. 나는 결단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닌데 그는 자꾸 날 그렇게 만든다. 가령 ‘저 입술은 무슨 맛일까?’라는 충동적 의문을 품게 한다든가. “키스해 봐도 돼요?” 나의 겨울 같은 상사는 눈처럼 차갑지만 “사직서 가져왔어?” “……왜요?” 어쩐지 너무 섹시하고 달아서…… “감히 상사를 꼬신 죄로.” 아마도 차갑고 달콤한 눈의 맛이 아닐까?
나, 송세아는 지금 제일 핫하다는 배우, 원준한의 앞에 앉아 있다. 난 그를 몰래 덕질 중이었고, 왜인지 그는 내게 자신의 팬카페 게시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도 내가 쓴 게시물에 대해 말이다. “아무리 연기라도, 내가 다른 여자랑 키스했으면 좋겠나 봐, 그 팬은?” “보기보다 되게 소유욕 있으시네. 팬이 배우님만 생각하면서 망상 속에 빠져 살길 바라는 거예요?” “소유욕? 아직 소유욕의 시옷 자도 안 보여 줬는데?” 어머머, 저 눈빛 뭐야? “모든 팬이 그런 망상 속에 빠져 살기를 바라지는 않아. 다만, 그 팬만은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 눈으로 그런 말을 하면 오해하게 되잖아! 거듭되는 겨울의 인연을 대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사내 최고 스타, 오승원 대리에게 사내 연애 유혹을 받은 하루. 망설이는 그녀 앞에 더 유혹적이고 위험한 남자가 나타났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그녀를 구해 준 남자, 서정우. 길바닥에서 새하얀 드레스 셔츠를 빛내며 색기를 뿜어내던 그가 알고 보니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는 옆 회사 사장님이자 그간 쭉 수상하게 굴던 옆집 남자였단다. 그런데 이 남자, 사고 이후 시시콜콜 그녀에 대해 캐묻고 감시하듯 굴더니 급기야! “사내 연애가 싫으면 사외 연애는 어때? 널 아주 잘 알고 있는 꽤 조건 좋은 남자가 있는데.” “누구요?” 그 순간 잘생긴 얼굴이 근사한 미소를 머금더니 바짝 다가온다. “네가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 ……응급처치를 다시 받아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심장이 멈출 것만 같으니까.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인 양 모든 것을 바친 여자가 있다. 황나윤,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그녀의 세상은 온통 도설우로 가득했다. 하지만 헤어진 캠퍼스 커플에게 남는 건 걔 친구가 내 친구여서 생기는 끔찍한 이별의 잔해뿐. “나윤아, 나 다음 달에 결혼해. 올 수 있어? 근데 알지? 내 남친이랑 설우랑 절친인 거. 걔가 축가 부를 건데, 안 불편하겠어?” 전 남친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도 마음 놓고 갈 수가 없다. 연애 주의 사항 첫 번째, 절대 소속이 같은 남자와 연애하지 말 것! 이리저리 연애를 피하다 보니 벌써 서른, 나윤의 앞에 유일했던 사랑 도설우가 다시 나타난다. 그것도 같은 부서, 직속 상사로. 연애 주의 사항 두 번째, 절대 헤어진 전 남친에게 다시 빠지지 말 것! 그런데 도설우가 아무래도 수상하다. 거침없이 찰 땐 언제고, 이젠 또 거침없이 들이닥친다. “프로젝트 합숙소가 호텔 방이라도 돼? 내 방에서 잠깐 회의만 하자는 거잖아.” 연애 주의 사항 세 번째, 절대 그놈과 다시 연애는 하지 말 것!
“선생님, 여자 친구 있어요?”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집중해.” “쓸데없는 거면……. 없는 거겠다. 그쵸?” 비루한 수능 점수를 구원해 주러 온 과외 선생님, 송원호. “너 우리학교 오고 싶다며. 그럼, 이런 문제 틀리면 안 돼.” 입학식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해 놓고선, 외국으로 날라 버렸다? 철없던 시절의 짝사랑을 잊고 살아가던 어느 날,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CAC건설 소속 송원호입니다.” 친구 여동생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국룰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사내 연애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그런데 네가 왜 우리 회사에 있는 건데? “만약 우리가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요? 송원호 님 집 현관문 도어록이 고장 나서 집에 갇혔어요. 그런데 아리따운 수리공인 제가 문을 고치러 온 거죠.” Play on play. 그녀가 기막힌 놀이를 제안했다. “고객님, 문 따고 들어가도 될까요?”
스물다섯 여름 그와 꿈같이 결혼했고, 스물여섯 겨울 그와 악몽처럼 이별했다. 사랑의 생멸을 함께한 이들의 불장난 같은 하룻밤. 다른 여자 품이 더 좋다며 이별을 고했던 남자가 단죄를 바라는 눈빛으로 다가온다. “기다릴게.” “일주일을 생각했는데도, 안 바뀌었나 봐?” 그는 녹음처럼 싱그럽게 웃으며 긍정했다. “그럼, 일주일만 다시 생각해 보고 와.” 언뜻 내비치는 그의 자신감이 우스웠다. “일주일씩 미룰 작정이야?” 낮게 가다듬은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럼,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정다인 얼굴 볼 수 있는 거네.” 죄인 심장이 그의 손아귀에 놓인 듯 아프다. “너밖엔 없었어, 다인아.” 최악을 피하려 선택한 차악으로 일그러진 날들. 이혼 후 5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앓고 있었다.
[2023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 부산스토리마켓 한국 IP 선정작] 규랑은 케이그룹의 부당한 인사 조처에 맞선 1인 시위 중, 그룹의 총수인 강 회장에게 기막힌 제안을 받는다. “연귀군 알지? 거기 죽은 내 남동생 손주가 틀어박혀 있거든. 그 아이 좀 찾아서 데리고 와 줄래요?” 그렇게 조카 손자 강이환이 칩거 중이라는 연귀군의 언덕마을로 향한 규랑. 그녀는 그곳에 자리한 펜션의 첫 투숙객이 된다. 서머싯 펜션과 카페의 주인 '서 대표'는 광고 모델 뺨치게 잘생기고, 오후에 동네 아이들 보모를 자처할 만큼 자상하고, 손에 행주를 달고 살 정도로 깔끔한데, 어딘지 모르게 수상하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수록 아픈 과거 속 첫사랑이 그리워지는 규랑은 과연 회장의 조카 손자를 찾아내서 서울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크고 작은 언덕이 많아서 언덕마을이라 이름 붙여진 곳에서 규랑의 굴곡진 추격이 시작된다.
가장 은밀한 곳을 내어 주고, 깊은 곳까지 맞닿아 세상 무엇보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은 갈망이 짙어진 순간. “그거 알아? 너한테선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나.” 그의 검은 눈동자에 두려움이 경련하듯 비쳤다. “순간적인 충동이나 욕구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열기가 부서져 내리는 탁한 목소리에는 허기가 역력했다. 감정은 의식하지 못한 순간 범람해서 투명하게 감각을 옥죈다. 서로를 향한 짙은 감정이 생명력을 얻는 데 걸린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다. 기나긴 세월을 축적해 온 관계에서 비롯된 욕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곡해될까 봐 두려운 거다. “나도, 그런 거 아니에요.” 삽시간에 비정상적으로 쏠린 마음을 어루만지듯 그의 뺨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매끄러운 살갗에 닿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두려운가? 두려웠었다. 그가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 저어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단단한 품에서 느껴지는 안온함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안정감이 한없이 이어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고요한 그의 눈길을 피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처절한 죗값을 미리 치렀으니, 한 번만 더 그의 품에서 무너지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언제나 고민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런데 살면서 유일하게 고민을 안 한 게 상무님이에요.” 과거 상처로 자신을 잃어버린 그녀, 고설하. “만약 끝까지 간다면? 평생 같이 살 생각까지 한다면?” 고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그, 기태오. 그녀가 원한 단 하나의 조건, 2년 전 태오가 약속한 꼭대기에 함께 서자는 것. “말로 할 때는 얼렁뚱땅 약속 지키겠다고 해 놓고, 막상 문서로 남기려니 두려우세요? 약속 못 지키실까 봐?” “결국 이 계약으로 내가 얻는 건 섹스밖에 없는 건가?” 태오는 한쪽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머금었다. “제 능력을 폄훼하시는 발언은 삼가세요. 상무님께서 얻는 건 누구보다 훌륭한 보좌 능력을 갖춘 비서인 거죠.”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그는 제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영원히 닿지 못할 거라면, 깊게 새겨지기를.’ 어느 한 사람조차 절대 놓지 못할 그들의 불온한 결속.
“로체 남벽은 누구도 정복한 적 없는, 신들의 정원입니다. 내년 봄, 우리 탐험대는 로체 남벽 등반에 도전합니다.” 극지 탐험에 있어서 가장 트렌디한 인물로 손꼽히는 권우연. 로체 남벽 탐험대의 후원사를 구하고 있던 그 앞에 우주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대한민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 프로젝트인 노아 프로젝트를 실행 중이며, 후원사가 되어 주는 대신 우주선에 탑승할 우주인들의 극지 훈련을 맡아 달라 했다. 그런데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저 신슬민이라는 여자. 분명 어디서 봤는데…… 그래서 더 시선이 가는 건가? 게다가 남자랑 헤어졌다고 길바닥에서 그렇게 예쁘게 울 건 뭐야? “그럼 신슬민 씨도 어제 남자 친구랑 헤어진 거 아닌가?” “아, 아니거든요!” 남자 때문에 운 게 아니었어? “그럼?” “나는 엄마.” 엄마? 엄마가 왜? “……엄마가 우주 가지 말래?” 매꼬롬한 분홍 진주알 같은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자, 내 이기심은 그녀를 갖기로 마음먹었다.
너와 나의 재회는 아담과 이브의 태초의 만남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너는 내 얼굴을 무구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난 너의 몸 위를 타고 구르는 물방울의 행보를 쫓다가 네 어마어마한 것까지 보고 말았다. “조의림. 이번에는 책임져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어쩌나? 나를 고용한 회사 오너의 아들이자, 내게 고백했다가 뻥 차인 소꿉친구 문심조와 다시 만나는 일은 내 계획엔 없는 일인데? “너는 계획 없으면 안 되는 애잖아? 내 상처를 치료할 계획은 내가 세워서 알려 줄게.” 참 이상해. 내 인생 계획에 난입한 널 저주해도 모자랄 판인데 난 너의 다음 계획이 궁금해서 미치겠다.
※ 새로이 업로드된 외전은 종이책 및 전자책 단행본으로 선출간된 외전과 동일한 내용이오니, 단행본 외전을 구매하신 독자님들께서는 중복 구매하시는 일이 없도록 참고 부탁드립니다. 짧은 기간 연인으로 지낸 이형과 주희. 이형에게 주희는 첫사랑이자 삶의 이유를 알려준 연인이었지만, 주희에게 이형은 그저 단숨에 타오른 불꽃에 불과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48시간 이내로 랭글리로 복귀할 것. 블랙 사이트(Black Site) 관련.’ 본부 소환 명령으로 그에게 무례한 이별을 건넨 주희, 본명 루나 송. 세계를 주름잡는 유대계 거부인 카를하인츠 로젠쉴트의 정부로 위장 잠입하기 위해 그의 저택으로 향하는데. 무례한 이별의 벌을 받는 것처럼 신기루 같은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발췌문 그의 입술이 루나의 입술에 닿을락 말락 했다. “내가 당신을 정부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다정하고 상냥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오만하고,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고작 이 몸뚱이 하나라는 뜻입니까?” 그는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듯 입을 놀렸지만, 이까짓 말에 상처받을 성격도 아니다. “카를하인츠 로젠쉴트 씨. 우리 솔직해질까요? 지금 이 몸뚱이에 발정 난 게 누구죠?” 그는 루나의 뺨을 어루만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입술을 멀리 떼어 내지도 않고 아슬아슬한 거리를 계속 유지했다. “유산을 물려받은 후에, 마뜩잖은 빌미가 될 정부가 필요했던 건가요? 그래서 정부를 구하는 일에 흥미가 동하지 않는 모양이죠? 만약 그게 아니라면 발정기 수컷처럼 하루에 두세 명씩은 끼고 잤을 텐데요.” 루나가 천진하고 무구한 얼굴로 떠들어 댔다. “눈을 병아리처럼 까맣게 뜨는 건 귀여운 척할 때 버릇입니까?” 약간은 어이가 없어져서 따지려는데, 그가 더 빨랐다. “계속해 봐요. 귀여우니까.” 카를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가 결혼하는 게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저 카페 단골손님이었던 그는 재벌가의 유력 후계자였고, 그가 베푼 껄끄러운 선의의 대가는 모두에게 해가 되는 상황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 결혼으로 내가 얻는 건요?” “재벌 3세 남편, 재벌가의 며느리 자격.” 잘생겼지만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는 전혀 탐나지 않는 타이틀을 내밀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함부로 머리채 잡는 여자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위치, 정신 나간 놈을 적당히 손봐 줄 힘, 불륜에 대한 결백, 그리고.” 불륜……. 이 남자는 아직도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다. 부정한 여자라고. “능력 있는 남자를 차지했다는 아주 좋은 평을 듣겠죠.” 부정한 주제에 저 같은 남자를 만난 걸 행운으로 여겨라 이건가?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는 남자가 참 뻔뻔해 보였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 생각할 시간은 하루 줄게요.” 결혼, 아니면 손해보상.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나, 송세아는 지금 제일 핫하다는 배우, 원준한의 앞에 앉아 있다. 난 그를 몰래 덕질 중이었고, 왜인지 그는 내게 자신의 팬카페 게시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도 내가 쓴 게시물에 대해 말이다. “아무리 연기라도, 내가 다른 여자랑 키스했으면 좋겠나 봐, 그 팬은?” “보기보다 되게 소유욕 있으시네. 팬이 배우님만 생각하면서 망상 속에 빠져 살길 바라는 거예요?” “소유욕? 아직 소유욕의 시옷 자도 안 보여 줬는데?” 어머머, 저 눈빛 뭐야? “모든 팬이 그런 망상 속에 빠져 살기를 바라지는 않아. 다만, 그 팬만은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 눈으로 그런 말을 하면 오해하게 되잖아! 거듭되는 겨울의 인연을 대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나는 결혼을 한 거지. 내가 하는 말에 바보같이 웃기만 하는 인형을 산 게 아니야.” 증권가를 주름잡던 애널리스트 출신의 유명한 화가, 강제우. 그는 자신의 컬렉션에 걸맞은 트로피 성시안을 아내로 맞이한다. “못된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잘도 하시네요.” 그저 자신을 돋보이게 할 도구에 불과한 여자였다. 그런데 마치 중세 프레스코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성녀처럼 유순하게 생긴 그의 아내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말을 들어 먹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난 당신이 가르쳐 준 대로 반응할 거예요. 나는 당신을 통해 배운 대로, 당신 앞에서만 반응할 거란 소리예요.” 그리고 그의 욕구를 정확하게 간파할 줄 알았다. * “아직도 내 키스가 어설퍼요?”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길 바랐건만, 시안의 목소리는 열기로 가득했다. 입술에 닿는 그의 숨결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처럼 어설프지는 않네요.” 딴에는 굉장히 후한 점수를 준다는 듯이 그가 오만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가르쳐 준 대로 한 거니까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다시금 시안의 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귀밑에 그의 숨결이 스치자, 시안은 여린 신음을 흘렸다. 살갗에 닿은 그의 입가의 웃음기가 진해졌다.
너와 나의 재회는 아담과 이브의 태초의 만남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너는 내 얼굴을 무구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난 너의 몸 위를 타고 구르는 물방울의 행보를 쫓다가 네 어마어마한 것까지 보고 말았다. “조의림. 이번에는 책임져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어쩌나? 나를 고용한 회사 오너의 아들이자, 내게 고백했다가 뻥 차인 소꿉친구 문심조와 다시 만나는 일은 내 계획엔 없는 일인데? “너는 계획 없으면 안 되는 애잖아? 내 상처를 치료할 계획은 내가 세워서 알려 줄게.” 참 이상해. 내 인생 계획에 난입한 널 저주해도 모자랄 판인데 난 너의 다음 계획이 궁금해서 미치겠다.
“우리가 결혼하는 게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저 카페 단골손님이었던 그는 재벌가의 유력 후계자였고, 그가 베푼 껄끄러운 선의의 대가는 모두에게 해가 되는 상황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 결혼으로 내가 얻는 건요?” “재벌 3세 남편, 재벌가의 며느리 자격.” 잘생겼지만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는 전혀 탐나지 않는 타이틀을 내밀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함부로 머리채 잡는 여자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위치, 정신 나간 놈을 적당히 손봐 줄 힘, 불륜에 대한 결백, 그리고.” 불륜……. 이 남자는 아직도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다. 부정한 여자라고. “능력 있는 남자를 차지했다는 아주 좋은 평을 듣겠죠.” 부정한 주제에 저 같은 남자를 만난 걸 행운으로 여겨라 이건가?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는 남자가 참 뻔뻔해 보였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 생각할 시간은 하루 줄게요.” 결혼, 아니면 손해보상.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일어나시죠, 유승현 씨.”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며칠 새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남의 영업장까지 찾아오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냐? 아르바이트로 대타 맞선을 보는 자리, 이 남자가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르바이트해서 축구 선수인 동생 뒷바라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쪽이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동생을 국가 대표로 만들어 주겠다는 에이전트 한지윤. 일언지하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앞으로 저런 인간들은 내가 상대해. 내가 지킨다는 뜻이야, 너도 그리고 네 누나도.”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 입술이 가볍게 한 번 스쳤다. 그는 승현의 이마에 입을 한 번 맞추고는 다시 젖은 입술을 머금었다. 그의 입술이 말도 못 하게 달콤해서 도무지 그를 밀어 낼 수가 없었다. 깊게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그가 승현에게 이마를 맞댄 채로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 안고 싶어.”
인형 같은 외모,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에 조부가 장관을 지낸 집안의 딸. 모든 걸 손에 쥐고 세상을 내려 보는 것 같았던 차도연이 몸을 휘청 기울일 정도로 뺨을 맞는 걸 본 순간, 심장이 나동그라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너의 일탈이 되어 줄게.” 꽉 막혀 있는 끔찍한 삶에서 숨통이 트일 만한 소소한 일탈을 선물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는, 내가 너의 일상이 되어 줄게.” 그녀의 전부가 되고 싶어졌다. *** 도연은 조심스럽게 맞닿아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승재야.” 먼저 목소리를 낸 건 도연이었다. 승재는 눈을 깊게 감았다 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나, 너 갖고 싶어.”